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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頂스님 [인간과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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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7-01 10:12 조회421,820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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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구문화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신성과 세속의 분리, 정신과 물질의 분할, 개인주의의 성장, 물질적 발전에 대한 지나친 예찬 등을 가져왔고, 그 결과 일류는 환경오염과 생태계의 파괴라는 미증유의 위기를 자초하게 되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정복과 착취의 관계가 아니라 협력과 동반의 관계로 바뀌어야 한다. 다음 글은 88년 서울올림픽 국제학술회의에서 법정(法頂)스님이 발표한 내용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 읽어보기
자연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질적인 혹은 정신적인 필수불가결의 수많은 것들을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무상으로 제공해주고 있다. 마치 인자한 어머니가 어린 자식에게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듯이. 이와 같은 자연의 선물을 제대로 적절히 사용하면 인간의 생활에 빛이 나고 유익하다. 그러나 그 선물을 과용하거나 잘못 사용하면 거기에 상응한 배은망덕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된다.
이 지구가 지니고 있는 핵연료는 인간끼리의 살상이나 지구의 파멸을 위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이 개발한 핵무기 앞에 인류의 생존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이 모순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석탄이나 석유와 같은 화석연료를 과도하게 소비함으로써 인간이 잘 살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존의 위협을 받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연료의 과도한 소비는 지구를 하나의 커다란 온실로 만들게 된다는 연구결과가 최근 전문가들에 의해 조사․보고되고 있다. 그 결과 극심한 가뭄으로 가축들의 생존에 대한 위협과 농산물의 감수를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킨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의 지불이며 경고인 것이다. 자식이 어머니의 은혜와 제 분수를 모르고 너무 오만해진 데서 온 인과응보인 것이다.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못하고, 넘치는 것은 덜 참만 못 하다. 적은 것일수록 더욱 사랑할 수 있다. [작은 것은 아름답다]를 쓴 영국의 경제학자 슈마허가 지적했듯이, 무한한 성장은 유한한 세계에 적합하지 않다.
자연은 우리 인간에게 영원한 모성(母性)일 뿐 아니라 위대한 교사다. 자연에는 그 나름의 뚜렷한 질서가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계절의 질서가 있고, 뿌려서 가꾼대로 거두는 수확의 질서가 있다. 가뭄이 심하면 비를 내려 해갈시키고, 홍수가 나면 비를 멎게 하여 날이 든다. 바람을 일으켜 갇혀 있는 것을 풀어주고 낡은 것을 떨어뜨리며, 끊임없이 흐르게 하여 부패를 막는다. 밝은 낮에 일하면서 쌓인 피로를 덜어주기 위해 어둠이 내려 쉬도록 해준다. 이와 같은 자연의 질서에 우리들 인간은 순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서 우리 삶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되도록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익혀야 한다. 자연스러운 것이 바로 건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나무와 물과 흙과 바위로 이루어진 단순한 유기체가 아니다. 그것은 커다란 생명체이며 시들지 않는 영원한 품속이다. 자연에는 꽃이 피고 지는 자연현상만이 아니라, 시가 있고 음악이 있고 침묵이 있고 사상이 있고 종교가 있다. 인류역사상 위대한 사상이나 종교는 벽돌과 시멘트로 쌓아 올린 교실에서가 아니라, 때묻지 않은 대자연 속에서 움트고 자랐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나무들이 청청한 가지를 펼치고 있는 숲 속에서, 시작도 끝도 없이 도도히 흐르는 강변에서, 혹은 밤과 낮의 기온차가 심한 침묵의 사막에서 위대한 사상과 종교가 움트게 됐다는 사실은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육신에 탈이 나거나 병이 들면 병원을 찾아가 치료를 받지만, 영혼이 지쳐 있거나 병들어 있을 때는 병원을 찾아가도 쉽게 낫지 못한다. 어린아이가 엄마의 품을 찾아가듯이 자연의 품속에 안겨, 자연의 소리를 듣고 그 질서를 우리 것으로 받아들일 때 다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앓고 있는 정신질환인 노이로제는 약물치료로는 나을 수 없는 문명의 병이다. 자연과 더불어 가장 자연스러운 생활을 통해서만 정신상태는 자연스럽게 제 기능을 하게 된다. 대지와 수목과 화초와 물을 가까이하면 사람의 정신상태는 지극히 평온해진다. 조급히 서둘 필요고 없이 질서정연도 생명의 바다에서 헤엄을 치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인가를 스스로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자연은 말없이 우리에게 많은 깨우침을 준다. 자연앞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얄팍한 지식 같은 것은 접어두어야 한다. 그리고 침묵해야 한다. 그래야 침묵속에서 ‘우주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 이 침묵 속에서 창조의 비밀과 사랑의 신비를 캐낼 수 있다. 하나의 씨앗이 대지에 묻혀 움이 트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때까지의 그런 인내와 침묵이 자연 속에서는 절대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자연 자체가 원초적인 침묵이기 때문에 자연의 실체를 인식하려면 무엇보다도 침묵이 전제되어야 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기 전에 무거운 침묵이 있었음은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침묵이야 말로 자연의 말이고 우주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뛰어난 사상과 위대한 종교는 가지에서 또 다른 가지를 치는 시끄러운 언어에서가 아니라, 자연의 침묵에서 싹텄다는 사실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사막의 교부들이나 불교의 선사들이 우주의 언어인이 침묵 속에서 성장하면서 거듭나게 됐다는 사실은, 말을 참지 못하고 함부로 쏟아놓는 현대의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어떤 고행자가 사막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한 성자를 찾아가 물었다. “스승님, 제가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이에 대해 성자는 대답하기를 “만일 그대가 그대의 영혼을 구하고자 한다면 누군가 말을 걸기 전에는 결코 먼저 말을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그들은 침묵의 상대적인 중요성을 확실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 앞에서 우리들 인간은 침묵의 의미를 배워야 한다. 그리하여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기독교 성경의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만들어낸 남자와 여자에게 복을 내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위로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여기서 말한 ‘땅’을 ‘자연’으로 대체하더라도 상관이 없다. 이 정복(征服)의 사상에 기반을 둔 서양의 역사가 끝없는 정복과 착취와 폭력과 진압의 역사라는 사실은 낱낱이 예를 들어 증명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정복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 사람이 어떻게 이 거대한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단 말인가. 휘몰아치는 태풍과 폭우, 논바닥이 갈라지고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내는 혹심한 가뭄, 땅이 흔들리고 갈라지면서 폭발하는 화산과 지진을 사람이 어떻게 정복할 수 있단 말인가.
흔히 히말라야 같은 높은 산악의 등정에서 무슨 봉을 정복했다는 등의 신문기사나 TV․라디오 뉴스를 듣는 수가 없는데, 그것은 말도 안되는 잠꼬대 같은 소리다. 그 산봉우리를 참으로 정복한 것이라면 거기서 장기간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 시간도 못되어 엉금엉금 기어서 내려오고야 말지 않는가. 매스컴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배울 만큼 배운 똑똑한 사람들일 텐데 번번이 이처럼 무식한 표현을 서슴없이 쓰고 있다. 역시 <창세기>의 후예들인 모양이다. 목숨을 걸고 기어오르는 그 의지력과 용기가 가상해서 산이 잠시 받아들인 줄도 모르고 정복이라고 하니 얼마나 무지하고 오만한 소리인가. 산에서 조난당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산의 실체를 모르고 방심하거나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지나친 과욕과 자만심을 가진 데에서 그런 결과를 맞은 것이다.
금세기 전반기를 살다가 간 영국의 등산가이며 저술가인 스미스(F.S.Smythe)은 [산의 정기(The Spirit of the Hills)]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연은 우리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훈련으로 정복되어야 하는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한 부분이며 만물에 이어진 아름다움과 장엄이다. 산에서 우리는 깨달음을 얻고 삶의 의미를 배운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이 높은 산에 오르는 것은 자연과의 친화(親和)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정상에 도달하는 것만이 등산의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그저 그날의 계획중 한 가닥 황금의 실일 뿐이다. 마치 군인들이 일찍이 다른 군인들이 점령한 도시를 짓밟듯이 그렇게 정상을 짓밟아서는 안된다. 다만 감사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방문하도록 해야 한다. 이와같은 정신은 비단 등산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사에도 해당될 것이다. 어떤 높은 자리를 차지하느냐에 인생의 목적이 있지 않고, 자기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매순간마다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아가는 데 삶의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보다 가치 있는 것은 산마루가 아니고 산마루에 도달하는 그 일(과정)이다. 스미스의 표현을 빌리면 ‘왕관이 아니라 왕국’이라는 것이다. 즉 등산의 기쁨은 내 발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면서 차분히 산봉우리들을 바라보고, 산의 향기를 맡고, 산의 맥박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그리고 정상에서의 침묵은 가장 느긋하고 거룩한 휴식임을 알아야 한다. 갖은 고생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험한 세상을 다 살아온 사람이 자신의 저녁놀 앞에서 할 말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저 묵묵히 자신이 걸어온 인생의 자취를 되돌아볼 뿐이지.
자연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냥 있는 땅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친 삶의 터전이다.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들이 아득한 그 옛적부터 삶을 이루어온 땅. 우리들의 육친과 친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피와 살과 땀이 녹아든 흙, 수많은 영혼들이 잠들어 쉬고 있는 성스러운 대지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땅이 돈벌이의 도구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영토확장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된다. 땅은 그 땅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꾸고 지킬 뿐이다.
 

댓글목록

밝은세상님의 댓글

밝은세상 작성일

에구~ 모니상으로 읽으니 눈이 빠지네요. ㅎㅎ 그래도 우리의 환경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법정 스님의 명문장이 아닌가 합니다. 환경연맹의 작은 힘으로 좋은 환경 조성에 앞장서야겠습니다.

세상을 푸르게님의 댓글

세상을 푸르게 작성일

자연을 다시한번 생각하는 글이네요.

강동단원님의 댓글

강동단원 작성일

숨막히는 이 공간을 아름다운 강산으로....

용문사님의 댓글

용문사 작성일

자연!
 단 한번의 용서도 없는데!
 현재 인간은 스스로 살을 깍아먹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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